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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경제학 경제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어떤 사람일까?

by 땡큐베리머취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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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 스코틀랜드는 구질서와 신질서의 과도기였습니다. 구질서는 봉건주의적 질서, 절대주의적 질서이고 신질서는 근대 자본주의적 질서와 주유주의적 질서입니다. 18세기는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1760년대부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은 기술혁신으로 기계화를 가져왔으며 기계화는 대량 생산 체제를 가져왔습니다. 기계화로 생산된 많은 제품들은 넓은 시장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자유무역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유로운 시민 정신이 생기는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대가 왔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자유 경쟁의 원리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775년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하고 있었고 1789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은 각 나라의 내부 문제이긴 했지만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근대 질서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영국의 가혹한 억압 정치와 중상주의 무역에 반발하여 미국의 동부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일으킨 전쟁입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미국 내에서 구 식민주의를 개혁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또한 절대주의 시대에 맞서는 시민 혁명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의 계몽 사상가가 등장하여 비판 정신과 합리주의 사상, 진보 사상을 전파했고 존 로크 등이 주장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통제가 강했던 중상주의에 반대해서 자유 경제 이론을 주장하는 중농주의 사상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18세기는 산업화, 근대화, 혁명, 민주주의, 자유 경쟁 등의 신질서가 태동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살던 영국이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겪고 유럽 다른 나라들을 앞서가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되기 전까지 두 나라는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언어, 종교, 문화, 풍습 등 모든면에서 달랐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합병을 교섭한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였습니다. 1707년 양국 합병안의 통과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시장과 식민지에 진출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스코틀랜드는 오랜 빈곤에서 벗어나 번영을 향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지식인들인 흄, 스미스 등은 유럽 대륙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 커콜디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스의 아버지는 세관원이었고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대지주의 딸로 스미스를 낳기 전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미스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살아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스미스의 성품은 성실하고 학구적이었고 극단적인 것을 싫어했고 단정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는 소심한 편이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스미스가 태어날 무렵 커콜디는 북해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탄광업, 소금 공장, 정비소 같은 것들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공장들의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사립학교에 입학한 스미스는 독서 욕구가 강하고 매우 성실했으며 글래스고 대학의 생활은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글래스고는 서인도나 북아메리카 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항구였습니다. 글래스고는 식민지 무역을 통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정치의식도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글래스고 대학은 다른 명문 대학들에 비해 학문 수준이 높았고 진보적인 곳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보호를 받던 배타적인 학교였던 반면에 스코틀랜드의 대학은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해서 가톨릭의 구질서에 대항하여 칼뱅주의 노선을 따르는 신교의 종교 개혁이 성공적으로 일어난 곳이었습니다. 칼뱅주의는 사제가 중재자로 하나님과 개인을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개인을 직접 연결시키고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는 새로운 기독교 정신입니다. 스미스는 그래스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지만 당시의 옥스퍼드는 학문적으로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옥스퍼드는 전통과 특권에 안주하고 있었기에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미스는 무시를 당하고 따돌림당했습니다. 6년의 유학 기간 동안 스미스가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관한 교양이었습니다. 결국 학사 자격만 따고 23세 때 고국으로 돌아와 몇 년간 공개 강의를 하고 명성을 얻으며 모교였던 글래스고의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1751년 스미스가 논리학 교수로 부임할 때 존경했던 흄을 만나고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오랜 우정을 지속합니다. 스미스의 논리학은 혁신적이었습니다. 강의를 라틴어로 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모국어로 진행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율적인 사고나 표현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열광했고 도덕 철학 강의도 하면서 그의 처녀작인 <도덕 감정론>을 출간합니다. <도덕 감정론>은 스미스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렸던 명저였고 이 책이 출간되자 모스크바 대학에서 유학생을 보낼 정도로 그를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후 스미스의 관심은 법학이나 경제학 쪽으로 기울면서 사회 과학자로서 발전했습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바클루 공작의 대륙 여행 수행 교사로 나서게 됩니다. 스미스가 대륙 여행을 하던 시기는 1764년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7년 전쟁이 끝나고 오랜만에 유럽에 평화가 찾아온 시기였습니다. 여행 중 가장 큰 사건은 중농학파 경제학자인 케네와의 만남입니다. 케네의 사상은 스미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당대의 지식인들이 몰려 있는 프랑스의 살롱에서 화려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 돌바크, 디드로, 달랑베르 같은 사람들과 교류했고 이후 스위스를 여행하며 볼테르와 루소를 만났습니다. 2년 9개월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1766년 고향인 커콜디로 돌아와 10년 동안 <국부론>을 집필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스미스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시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1773년 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스미스는 친구 흄을 저작과 출판에 관한 유언 집행인으로 삼았지만 흄은 <국부론>이 출간된 지 몇 달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776년 3월 9일 <국부론>이 세상에 나오자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고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었는지 179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회 과학자들은 스미스를 바흐나 칸트에 비견하며 그가 가진 영향력에 대해 말합니다. 근대적인 것을 이야기하려면 근대의 개척자 애덤 스미스를 꼭 거쳐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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